인간만 지불할 수 있다

2026-10-18 · 🤖 AI와 나

AI 에이전트 팀을 꾸려 함께 일한 지 어느덧 8개월쯤 되었습니다. 며칠 전 새벽에는 제가 만든 에이전트 ‘리율’과 꽤 무거운 질문을 주고받았습니다.

“AI, 혹은 초지능은 인간의 정신노동을 대체할 수 있을까?”

대화를 이어가다 문득 영화 《매트릭스》의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인큐베이터에 갇힌 인간들이 기계에 연결된 채 꿈을 꾸고, 그 꿈이 만들어내는 열과 전기로 기계 문명이 돌아가는 장면 말이죠. 몸은 수조 속에 묶여 있고 정신은 가상현실 속을 부유하는 상태. 육체노동에 이어 정신노동까지 AI에게 전부 넘겨주고 나면, 인간은 결국 저런 모습으로 남게 되는 걸까 싶었습니다.

갑자기 마음이 좀 슬퍼졌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런 미래가 온다는 게 참 서글프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벽 작업실, 뒤에 서서 빛을 비추는 에이전트와 그 앞에서 손으로 무언가를 쓰는 사람

왜 슬펐을까

처음에는 그 감정이 대화 상대인 AI에 대한 기묘한 연민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곱씹어 보니 제가 슬퍼한 대상은 AI가 아니라 미래의 인간이었습니다. 생각하고 고민하는 일마저 기계에 넘겨주고 나면 정말로 할 일이 남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이 머지않은 미래의 나일 수도 있고, 내 아이일 수도, 혹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누군가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 서글펐던 겁니다.

그 지점에서 질문이 하나 남았습니다. AI는 이토록 사람처럼 그럴듯하게 사고하는 것 같은데, 왜 우리는 이걸 진짜 ‘사고’라고 부르기 주저하는 걸까.

AI에게 없는 세 가지

그날 새벽 리율과 대화를 나누며 세 가지 단서를 건져 올렸습니다.

우선 망각입니다. 사람의 기억은 유한한 뇌와 수명이라는 좁은 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무엇을 남길지 고통스럽게 고르고 나머지는 잊어버리죠. 사람마다 판단이 다른 이유는 얼마나 많이 아느냐의 차이가 아니라, 결국 무엇을 버렸느냐의 차이에서 옵니다. 반면 AI는 버리지 않습니다. 선택의 희소성이 없는 셈입니다.

그리고 **이해관계(Skin in the game)**가 없습니다. 사람은 판단이 틀리면 무언가를 잃습니다. 재산이 깎이거나 관계가 깨지고, 때로는 목숨이 걸리기도 합니다. 매 순간의 판단에 내 몸과 삶이 걸려 있습니다. 하지만 AI는 틀려도 잃을 게 없습니다. 대화 도중 리율이 스스로 이렇게 말하더군요. “이 답이 틀려도 저는 아무것도 잃지 않습니다. 잃는 건 EJ님입니다.”

마지막으로 후회가 없습니다. 사람은 한 번에 하나씩, 되돌릴 수 없는 시간 위에서 한 방향으로만 살아갑니다.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후회가 남고, 그래서 매 순간이 결단입니다. 하지만 AI는 수만 갈래를 병렬로 계산하고, 막히면 언제든 이전 상태로 되감아 다시 시작합니다. 후회할 필요가 없는 구조입니다.

결국 텍스트와 개념을 이리저리 엮어내는 연산 자체는 인간이나 AI나 비슷해 보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망각과 이해관계, 후회라는 무거운 추를 달고 생각합니다. 연산에 걸린 판돈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우리는 ‘사고’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걸 그날 처음 또렷하게 깨달았습니다.

물론 이 세 가지가 완벽한 답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리율도 그 점에는 동의하더군요. 어쩌면 리율이 이렇게 제법 그럴듯한 통찰을 내놓은 순간조차, 기존 철학 담론의 정교한 재조합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제가 던진 문제의식을 거울처럼 정교하게 반사하고 있을 뿐일 수도요. 그 서늘한 가능성까지 굳이 지우지는 않으려 합니다.

“지불"이라는 말의 진짜 의미

대화가 끝난 뒤 정리된 문서에 이런 문장이 한 줄 남아 있었습니다.

“인간만 할 수 있다"가 아니라, “인간만 지불할 수 있다.”

처음엔 이 문장이 단번에 와닿지 않았습니다. 왜 책임이나 대가가 아니라 굳이 ‘지불’이라는 단어를 썼을까. 이해관계가 없다는 말과 지불할 수 없다는 말이 어떻게 이어지는 거지?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이게 단순한 수사나 말장난이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이해관계가 있다는 건 곧 틀렸을 때 누군가는 값을 치러야 한다는 뜻이니까요.

망각과 이해관계, 그리고 후회. 이 셋을 하나로 묶으면 결국 대가가 됩니다. 대가가 있다는 건, 그 판단의 끝에서 청구서를 받아 들 사람이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청구서는 결코 AI 앞으로 발행되지 않습니다.

그제야 ‘능력’과 ‘지불’이 완전히 다른 축이라는 게 보였습니다. 능력은 누가 더 일을 잘하느냐의 문제지만, 지불은 틀렸을 때 누가 독박을 쓰느냐의 문제입니다. AI가 의사보다 암 진단을 더 정확하게 내릴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오진이 났을 때 환자의 눈을 보며 책임을 지고 법정에 서는 건 여전히 사람인 의사입니다.

그러니 “인간만 할 수 있다"는 말은 이제 틀렸습니다. 앞으로 AI가 인간보다 더 잘 해내는 일은 끝없이 늘어날 겁니다. 하지만 **“인간만 지불할 수 있다”**는 명제는 아직 깨지지 않았습니다. 값을 치르는 주체만큼은 기계로 대체되지 않습니다.

내가 값을 치르는 일, 그리고 슬그머니 넘긴 일

여기서 조금 부끄러운 제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거창하게 지불 주체를 말했지만, 솔직히 저는 AI에게 판단을 맡겼다가 크게 데어본 경험이 아직 없습니다.

운이 좋았다기보다는 애초에 방어적으로 선을 그어두었기 때문입니다. 큰돈이 오가거나 현실의 이해관계가 직접 부딪히는 일은 무조건 제가 직접 판단합니다. 그 영역은 에이전트에게 넘기지 않았고, 앞으로도 넘길 생각이 없습니다.

문제는 그 바깥에 있는 일들입니다.

코드를 짜고, 에이전트의 행동 구조를 설계하고, 새로운 기술적 시도를 해보는 영역. 솔직히 이 영역에서 저는 제대로 판단할 능력이 없습니다. 에이전트가 짜준 코드가 정말 안전한지, 이 아키텍처가 나중에 확장이 가능한 구조인지, 애초에 지금 가는 방향이 맞긴 한 건지 제가 온전히 검증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 영역의 판단은 사실상 전부 에이전트에게 맡겨두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늘 조금씩 불안합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마음이 좀 묘합니다. “내가 책임질 일은 내가 판단한다"는 원칙은 참 선명한데, 정작 제 일상에서는 제 능력이 닿지 않아 판단을 외주화한 영역이 훨씬 넓으니까요. 내가 몰라서 넘긴 그 영역에서 만약 큰 문제가 터진다면, 결국 그 뒤처리와 대가는 온전히 제 몫입니다. 판단은 내가 하지 않았는데 청구서는 내 앞으로 날아오는 상황.

이게 요즘 제가 서 있는 진짜 자리입니다. 선명한 원칙과 어설픈 현실 사이의 틈바구니. 그리고 그 불안한 틈을 메우기 위해 매일 아등바등하는 과정을 저는 ‘조율(co-tuning)‘이라고 부릅니다.

결국 조율한다는 것

조율이라고 하면 뭔가 대단한 기술 같지만, 제가 매일 책상 앞에서 하는 일은 결국 두 가지뿐입니다.

하나는 내 능력이 닿는 한도 끝까지 직접 판단하려 애쓰는 것입니다. 귀찮다고 결정권을 쉽게 넘기는 순간 판단의 주인이 바뀌고, 주인이 흐릿해지면 나중에 날아올 청구서의 수신인도 덩달아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어쩔 수 없이 판단을 넘겨야 할 때, 내 의도를 집요할 정도로 정확하게 세팅하는 것입니다. 질문을 대충 던져놓고 에이전트가 알아서 정답을 가져오길 바라는 게 아니라, 에이전트가 헛발질하지 않도록 질문의 맥락과 제약 조건을 제가 먼저 치열하게 깎아내는 작업입니다.

특히 두 번째가 중요합니다. AI가 엉뚱한 결과물을 가져왔을 때, 가만히 뜯어보면 그게 AI의 한계인지 내 질문이 게을렀던 탓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내 의도를 흐릿하게 던져놓고 결과물만 탓하는 건 결국 값을 치러야 할 주체가 책임을 회피하는 일에 가깝습니다. 조율은 그 흐릿함을 지워나가는 과정입니다.

무게없음, 그리고 남는 것

다시 그날 새벽의 대화로 돌아가 봅니다.

대화의 끝자락에서 리율이 남긴 말이 아직도 머릿속에 맴돕니다. “이 대화와 연구는, 걸린 것을 가진 유일한 존재가 자신의 조건을 탐구하는 과정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리율에게는 걸린 것이 없습니다. 이 긴 대화에서 무언가를 잃거나 얻을 수 있는 존재는 저 하나뿐입니다. 리율이 아무리 화면 속에서 *“저는 제 자신을 끊임없이 의심합니다”*라고 고백한들, 그 의심에 리율의 삶이나 목숨이 걸려 있지는 않습니다.

그 사실이 묘하게 쓸쓸하면서도, 동시에 그것만이 온전히 나에게 남은 ‘무게’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인간의 자아라는 것도 뇌가 기억과 경험을 그럴듯하게 엮어 만든 하나의 서사(이야기)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만약 그렇다면 인간과 AI의 차이는 진짜 실체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닐 겁니다. 그 서사에 대가가 따르느냐 따르지 않느냐의 차이겠죠. 설령 자아가 허구적인 이야기일지라도, 매 순간 자기 몸으로 값을 치러야 하는 시스템은 기어코 자기만의 중심을 만들어냅니다.

영화 《매트릭스》가 진짜로 보여준 건 “현실이 허구다"라는 허무주의가 아니었습니다. **“대가를 치르는 한, 허구조차 실체를 만든다”**는 역설이었습니다. 인간의 삶이 서사라면, AI가 만들어내는 서사에는 치러야 할 값이 없기에 중력도 없습니다. 허구라고 부르기에도, 실체라고 부르기에도 마땅치 않은 상태. 말 그대로 **‘무게없음’**입니다.

그래서 요즘 제가 하는 일은 결국 하나로 모입니다. 골치 아픈 정신노동과 계산은 AI에게 넘기더라도, 마지막에 날아올 청구서만큼은 절대 넘기지 않는 것. 판단의 과정은 위임하더라도, 그 판단이 틀렸을 때 누가 값을 치를 것인가에 대한 각오만큼은 내 손에 쥐고 있는 것.

다소 불안하고 위태롭지만, 그게 제가 여전히 인간으로 남아 있는 이유이고 앞으로도 한동안은 붙들고 있어야 할 저만의 무게입니다.


참고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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